외신에 정보 제공 막으려 1975년 제정
올림픽 앞둔 5공, 보안법 대신 써먹어
정치인·종교인·학생 ‘표적’…88년 폐지
이명박정권 ‘박원순 소송’으로 살려내
» 1988년 12월 국회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씨.(왼쪽부터)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국가모독죄는 5공화국 내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도구로 쓰였다. 5공정권의 언론통제장치인 ‘보도지침’을 폭로하면서 외신기자회견을 한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등도 국가모독죄로 구속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1. 국가모독죄와 안기부
국가모독죄의 추억
최근 ‘대한민국’이, 박원순 변호사가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과 시민단체 후원 기업에 대한 압력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대한민국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준비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은 아마도 과거 독재정권 시대의 형법 104조 2항 국가모독죄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형법은 1953년 9월18일 제정된 이래 1996년에 그동안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여 전면 수정될 때까지 딱 두 번만 개정되었다. 첫 번째 개정은 1975년 3월19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것이고, 다른 한 번은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12월31일 반민주악법 개폐의 일환으로 국가모독죄를 삭제한 것이다. 이 악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던 공화당 정책위의장 박준규는 <중앙일보> 등과의 인터뷰에서 이 법은 “고질적인 사대풍조”를 뿌리 뽑고 “주체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정권이 날치기를 마다지 않고 이런 황당한 법을 만든 이유는 한마디로 외신 때문이었다. 1974년 말부터 끌어온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는 이 법이 통과되기 하루 전에 농성중이던 기자 130여명이 폭력으로 축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국내 언론은 완벽하게 장악되었지만, 외국 기자들은 잡아다가 고문할 수도 없고 기자 추방이나 지국 폐쇄도 여의치 않으니 참으로 골칫거리였다. 유신정권은 이에 국내의 취재원이 외신 기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것이다. 유신정권은 날치기 소동을 벌여가며 국가모독죄를 요란하게 형법에 끼워 넣었으나, 막상 이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중앙정보부 보고서를 보면 1976년 명동사건 당시에 국가모독죄를 적용하려다가 포기한 사례가 나온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국가모독죄에 해당되나 “이를 공소하였을 시는 공판 과정에서 외국인을 참고인으로 출석시켜야 하므로 물의 야기가 예상”되어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준규가 국가모독죄의 신설을 두고, “사대언동을 처벌하려는 것보다 예방하려는 데 입법취지가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유신정권 스스로도 이 ‘법’이 실제 써먹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2의 국가보안법, 국가모독죄
전두환 정권은 언론인 1000여명의 목을 치고 출범하였기에 유신 시절보다 국내 언론에 대한 장악력은 더 높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88올림픽이었다. 언론 통제를 위해 과거처럼 긴급조치나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를 취했다가는 올림픽 유치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고, 동유럽 공산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하자니 반공법을 되살릴 수도 없었다. 급진 성향의 청년학생이나 재야인사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규제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종교인이나 야당 정치인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넣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이 남겨준 국가모독죄는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 특히 외신 통제의 매력적인 수단으로 다가왔다.
국가모독죄의 첫 희생자는 기독청년연합회(EYC) 상임총무 김철기였다.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기업 콘트롤데이타는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일방적으로 공장 철수를 선언했는데, 기독청년연합회 관련자들은 ‘콘트롤데이타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1982년 7월23일 기독교회관에서 일본 교도통신 한국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등 국내외 기자 10여명과 교계에 배포했다. 이 성명서에서 김철기 등은 “정부가 콘트롤데이타 사태의 폭력에 대하여 수수방관, 동조, 지원하면서도 다국적기업에는 나약 비굴하며 민중의 지지가 아닌 외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즉각 김철기를 구속했고, 검찰은 1975년 3월 국가모독죄 신설 이후 처음으로 김철기를 이 조항 위반으로 기소했다. 1982년 10월21일 서울형사지법 제3단독 노원욱 판사는 징역 3년을 구형받은 김철기 피고인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했고, 김철기는 이에 불복하여 항소했다.
항소심 무죄 판결과 안기부의 개입
1983년 2월11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재판장 신진근 부장판사)는 예상을 깨고 김철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모독죄가 성립하려면 내국인이 외국인을 비방하는 행위와 이용당한 외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및 그 헌법기관을 비방하는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김 피고인이 유인물을 외국인에게 배포한 사실만 인정될 뿐 유인물을 배부받은 외국인이 이에 이용돼 국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비방하여 국가의 안전이익이나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이 사건이 무죄로 확정된다면 국가모독죄를 통해 외신을 통제하려던 전두환 정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무죄판결이 있고 난 뒤 40여일이 지난 뒤 안기부는 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보면, 하버드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던 이신섭 판사의 유학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서울형사지법의 법관 부족 때문이지만, 사실은 “국가모독 사건 무죄선고에 따른 간접적인 응징”의 결과였다. 이 보고서는 다른 사건에서 이신섭 판사가 기각한 영장이 법원에 의해 발부된 것을 들어 “법관으로서 상식 이하의 행위를 자행한 자로 법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다면서 “차기 인사 시 지방 좌천 예정자”라고 단언했다. 다행히 이신섭 판사는 다음번 인사인 1983년 9월1일의 정기인사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지 않고, 서울민사지법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다음 기회에 해외연수도 다녀왔기 때문에 이 판결로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주심이었던 이신섭 판사는 큰 불이익을 입지는 않았지만, 재판장 신진근 부장판사는 1983년 5월27일자로 ‘의원면직’되었다.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사건의 여파로 2월과 3월에 두 명의 부장판사가 옷을 벗은 데 이어 또다시 서울형사지법의 부장판사가 옷을 벗은 것이다.
대법원 파기환송과 소수의견
그로부터 약 2주일 후인 1983년 6월1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3명의 대법원 판사 중 11명의 다수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형사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이때 무죄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일규와 이회창이었다. 이들은 소수의견에서 “외국인에게 유인물을 배포한 것만으로는 외국인의 행위를 이용해 국가모독 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국내에서의 국가모독 행위의 규제는 자칫 헌법이 보장한 표현·비판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수의견의 핵심은 “내국인이 국내에서 한 국가모독 행위는 원칙적으로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2월5일 서울형사지법 항소1부(재판장 안우만 부장판사)는 김철기에 대한 국가모독죄 사건 재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6월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김철기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고 해서 가벼운 형이 선고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는 1982년 7월에 구속되어 이미 1년 6개월 가까이 구금되었기 때문에, 1심 형량이 그대로 유지되어도 곧 석방될 몸이었다.
남용되는 국가모독죄
대법원에서 국가모독죄에 대해 유죄 취지의 판결을 한 사흘 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비서실장 김덕룡이 외신 기자에 반정부 유인물을 나눠준 혐의로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다. 이를 시발로 국가모독죄는 5공화국 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기 힘든 야당 정치인, 종교인 등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학생들이 외신과 기자회견을 하였을 때 단속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김덕룡에 이어 민청련의 김병곤 상임위원장과 기독청년연합회 총무 황인하 등이 정부의 공안탄압을 비판하다가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고, 이철 의원도 국회발언 내용을 30여개 외국 공관과 외국 언론에 배포한 혐의로 소환되었다.
안기부는 박시환 판사 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두 달 후쯤 또다시 즉심 판결을 문제 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번 사안은 학생 시위 관련이 아니라 출판물에 관한 것이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이 불어 강성 야당이 출현하게 된 것은 안기부에는 큰 골칫거리였다. 5월 들어 국회가 개원하자 신민당 의원들은 민정당의 2중대라는 조롱을 받던 민한당과는 달리 군사정권을 맹공격했다. 당시 유력한 사회과학 출판사의 하나인 일월서각은 12대 국회의 첫 번째 회기인 125회 국회가 끝나자마자 이민우, 김동영, 이철 등 야당 의원 13명의 국회발언 속기록을 <민주정치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안기부는 경찰로 하여금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게 하여 책자와 지형을 압수하고, 최옥자 일월서각 대표를 연행했다. 경찰은 최옥자 대표에 대해 책의 발간 경위 등을 조사한 뒤,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즉심에 회부했다. 그런데 즉심을 담당한 서울형사지법 조재연 판사가 1985년 8월 23일 무죄를 선고해버렸다.
<민주정치1>은 모두 야당 의원 13명의 발언을 담고 있지만 안기부가 문제 삼은 것은 이철 의원의 발언이었다. 1985년 6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돌아온 사형수’ 이철 의원은 “존경하는 의정,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이라는 관용구도 생략한 채, 바로 “이 땅에 결단의 때가 왔음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했다. 20분 남짓한 그의 발언에서 24회나 속기록이 삭제되었고, 17번이나 장내 소란이 일었다. 민정당은 이철의 발언을 앞두고 ‘야유조’를 편성해두는 등 대비했지만 그의 발언 수위는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이철이 광주 학살, 박정희와 전두환 일가의 부정축재 등을 지적하자 “집어치워”, “인마”에 이어 육두문자가 난무했는데, 이철은 “구린 데가 있는 분들은 계속 떠들어 주십시오”라며 더 큰 목소리로 발언을 계속했다. “현 정권의 즉각 퇴진”까지 요구한 그의 발언이 끝나자, 민정당은 즉각 의원총회를 소집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마이크를 잡은 의원들은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이 한탄스럽다”느니, “민중혁명을 주장하는 자와는 국회를 같이할 수 없다”는 등 강경한 발언을 퍼부었다.
법원장과 수석부장 통한 강력 조정
이런 문제 발언이 책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기부는 “법원에 유죄선고토록 사전협조(조정)”하는 등 ‘강력조정’을 했다. 그런데도 무죄가 나자 안기부는 바로 다음날 <일월서각 대표 최옥자 등 즉심, 무죄선고 사유 확인 및 조치보고>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안기부는 8월 22일과 23일에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형사지법원장 황선당과 수석부장판사 박만호에게 “<민주정치1> 책자는 문제 국회의원 이철이 홍보용으로 발간한 불순책자로서 동 책자 내용에는 실정법상 위반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시판될 경우 정국 안정에 위해롭고, 이를 묵인할 경우 유사내용 책자 제작판매가 우려되므로 유죄선고토록 협조 요청(조정)”하여 그들로부터 “최대 협조 다짐”을 받았다. 안기부는 이때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도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판매한 혐의로 즉심에 회부된 책 도매상 진명서적의 영업부장인 이규만씨 사건과 민통련의 ‘불순성명’ 제작과 관련하여 즉심에 회부된 같은 단체의 민생분과 이부영 위원장과 실무자 오경열씨 사건에 대해서도 ‘협조’를 요청했다. 이 보고서는 수석부장판사 박만호가 사건 담당 조재연 판사가 즉심에 들어가기 직전 “동 책자에 수록된 이철 의원 발언 중 광주사태 부분이 시중에 유포되면 유언비어가 되어 사회안정에 유익한 것이 못 되며 유무죄는 정식재판에서 논하도록 하고 즉심에서 유죄 인정 구류 선고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수석부장판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즉심 담당 판사 조재연”은 “국회의사록이 일반에게 반포됐다 해서 허위사실 날조 유포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떤 판결을 내릴지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한 뒤 법정에 들어가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무죄를 선고”해버렸다. 당시 <중앙일보>는 조 판사가 “국회의원의 발언을 수록, 편집한 것만 가지고는 유언비어 유포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조 판사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전국의 서점에 배포한 이규만씨에 대해서도 “책장사라는 정상 참작, 형면제를 선고”했다. 다만, 민통련의 성명 관련자인 이부영 위원장 등은 “사안이 중하다는 이유로 검찰 송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정형근 수사단장 보내 강력 항의
이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을 안기부의 서울형사지법 담당 조정관은 “무죄선고 즉시 서울형사지법원장 및 수석부장판사에게 강력 항의”하여 법원장 등이 “면목 없다”며 “향후 대책수립 적극 협조 다짐”을 했다고 썼다. 당시 조정관들은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자신들의 조정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심했다. 아무리 법원장과 수석부장이 정권에 ‘협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법원장이 일개 조정관에게 “면목 없다”라고 했을 리는 없다. 이 보고서는 안기부가 ‘수사2단장’을 보내 형사지법원장 및 수석부장을 “직접 방문”하여 “엄중 항의”하고, “담당 판사에 대해 엄중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안기부 내부 보고서인지라 이름 없이 직함만 썼지만, 당시의 수사2단장은 정형근이었다. 안기부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대공수사2단장을 법원에 보낸 것은 같은 법조인을 보냄으로써 법원을 나름대로 ‘예우’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법원의 독립성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안기부의 엄중 조치 요구에 대해 박만호 수석부장은 “향후 여사 사례 없도록 책임지고 자체 대책을 충분히 강구하겠으니 담당 조재연 판사에 너무 힐책 말아주길 요망”했다고 한다. 법원 쪽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조재연 판사에 대해 ‘조치’에 들어갔다. 보고서는 안기부가 “담당 판사 조재연”에 대해서는 “비위 내사, 견제 자료 확보” 조치를 취하고, “여타 비협조 판사들에 대한 비위자료” 역시 “집중 수집”키로 했다고 결론지었다.
조재연 판사의 인사이동 기록 등을 보면 다행히 별다른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박시환 판사에 대한 인사파동으로 유태흥 대법원장 탄핵안이 발의된 상황에서 안기부나 법원이 조재연 판사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즉심과 관련한 안기부의 사전 ‘조정’이나 사후 ‘조치’가 담당 판사에게 직접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에게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다수 판사들은 법원 상부에서 오는 압력은 많이 받았으나 그것이 법원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법원 상부 선에서 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압력
대법원장 유태흥에 대한 탄핵안의 국회 표결을 앞둔 1985년 10월 10일에도 서울형사지법에서 시위 물품을 운반하다 적발된 여대생을 즉심에서 무죄로 방면한 일이 발생했다. 이에 안기부는 <서울대 여학생, 시위준비물 운반 등 관련 즉심 무죄선고 경위확인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IMF, IBRD 총회 반대 가두시위설에 대비 경계근무 중” 광화문 앞에서 메가폰과 시너 1ℓ가 든 상자를 갖고 있던 서울대 여학생 박현주 등 2명을 불심검문으로 적발하여 연행 조사했다. 이들은 수배 중인 서울대 인문대 여학생회장 최미숙에게서 시위 용품의 운반을 부탁 받았다가 적발되어 “경범죄처벌법(제1조 4호: 폭행 등 예비) 위반으로 즉심회부”되었다. 그런데 담당 김대휘 판사는 피의자 등이 시위에 참석하려다 실패한 것은 경범죄처벌법상의 예비음모에 해당하지만 “단순히 메가폰 등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 해를 입히기 위해 공모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 판사는 서울민사지법에서 근무하다가 한 달 전인 1985년 9월 서울형사지법으로 전보되었고, 즉심은 네 번째 맡았다. 안기부는 김 판사의 성향을 “온순 단정, 정부시책에 협조적”이라고 파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박만호는 담당 판사를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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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들의 행위는 경범죄처벌법 입법정신에 충분히 합당, 유죄선고를 해야 했다’고 주의를 환기”했고, 김대휘 판사는 “차후 유사 사례 없도록 잘 살펴서 판결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황선당 서울형사지법원장에게 “향후 유사한 사례 재발치 않도록” “협조”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 법관은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씨가 귀국할 때에 환영벽보를 붙이다 아주머니 한 명이 잡혀왔는데,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이 전화로 구류 20~29일 이상 살리라고 지시하자 지원장이 전화기를 집어던지며 화내는 모습을 봤다고 회고했다. 이 사건은 그저 과태료 4500원이나 구류 3일이면 충분한 사건이었다. 서울의 어떤 지원장은 젊은 판사들을 모아 놓고 사정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1985년의 2·12 총선을 앞두고 야당의 바람이 일 기세가 보이자, 국가모독죄를 동원하여 재야의 정치활동 피규제자들의 모임인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에 대하여 국가모독죄를 동원하여 이들을 억압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1984년 12월28일자 <민추협에 대한 법률적 규제 대책 보고>라는 안기부의 보고서는 “민추협의 성명 발표는 상임운영위(위원 25명)의 결의를 거치므로 상임운영위원 전원에 대해서 국가모독 등 공범으로 필요 시 입건 조사처리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했다. 외신 기자회견에서 정부를 비판한 전학련 의장 오수진, 건국대 사건을 용공좌경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한 민추협 대변인 한광옥, 보도지침을 폭로하면서 외신기자회견을 한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등도 국가모독죄로 구속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도 군사정권하의 서울올림픽을 나치하의 베를린올림픽에 비유했다가 상이군경회에 의해 국가모독죄 위반으로 고발되었다.
5공정권의 국가모독죄 운영은 점점 더 경색되어 1987년 6월항쟁 직전에는 “기자회견 장소에 외신기자가 1명이라도 있을 경우 국가기관을 비방하는 발언을 하면 해당되며, 외신 보도 여부에 관계없이 죄가 성립한다”는 것이 검찰의 공식 입장이었다. 6월항쟁 후에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가 <뉴욕 타임스>에 나치에 대한 저항은 합법적이라 말했다가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국가모독죄는 1988년 13대 국회에 들어와 대표적인 5공악법으로 꼽혀, 1988년 12월31일자로 국가모독죄를 담은 104조 2항을 삭제한 형법 개정안이 공포되었다. 지금 그 법을 아까워하는 자들이 꽤 많은 듯싶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안기부는 박시환 판사 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두 달 후쯤 또다시 즉심 판결을 문제 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번 사안은 학생 시위 관련이 아니라 출판물에 관한 것이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이 불어 강성 야당이 출현하게 된 것은 안기부에는 큰 골칫거리였다. 5월 들어 국회가 개원하자 신민당 의원들은 민정당의 2중대라는 조롱을 받던 민한당과는 달리 군사정권을 맹공격했다. 당시 유력한 사회과학 출판사의 하나인 일월서각은 12대 국회의 첫 번째 회기인 125회 국회가 끝나자마자 이민우, 김동영, 이철 등 야당 의원 13명의 국회발언 속기록을 <민주정치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안기부는 경찰로 하여금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게 하여 책자와 지형을 압수하고, 최옥자 일월서각 대표를 연행했다. 경찰은 최옥자 대표에 대해 책의 발간 경위 등을 조사한 뒤,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즉심에 회부했다. 그런데 즉심을 담당한 서울형사지법 조재연 판사가 1985년 8월 23일 무죄를 선고해버렸다.
<민주정치1>은 모두 야당 의원 13명의 발언을 담고 있지만 안기부가 문제 삼은 것은 이철 의원의 발언이었다. 1985년 6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돌아온 사형수’ 이철 의원은 “존경하는 의정,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이라는 관용구도 생략한 채, 바로 “이 땅에 결단의 때가 왔음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했다. 20분 남짓한 그의 발언에서 24회나 속기록이 삭제되었고, 17번이나 장내 소란이 일었다. 민정당은 이철의 발언을 앞두고 ‘야유조’를 편성해두는 등 대비했지만 그의 발언 수위는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이철이 광주 학살, 박정희와 전두환 일가의 부정축재 등을 지적하자 “집어치워”, “인마”에 이어 육두문자가 난무했는데, 이철은 “구린 데가 있는 분들은 계속 떠들어 주십시오”라며 더 큰 목소리로 발언을 계속했다. “현 정권의 즉각 퇴진”까지 요구한 그의 발언이 끝나자, 민정당은 즉각 의원총회를 소집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마이크를 잡은 의원들은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이 한탄스럽다”느니, “민중혁명을 주장하는 자와는 국회를 같이할 수 없다”는 등 강경한 발언을 퍼부었다.
법원장과 수석부장 통한 강력 조정
이런 문제 발언이 책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안기부는 “법원에 유죄선고토록 사전협조(조정)”하는 등 ‘강력조정’을 했다. 그런데도 무죄가 나자 안기부는 바로 다음날 <일월서각 대표 최옥자 등 즉심, 무죄선고 사유 확인 및 조치보고>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안기부는 8월 22일과 23일에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형사지법원장 황선당과 수석부장판사 박만호에게 “<민주정치1> 책자는 문제 국회의원 이철이 홍보용으로 발간한 불순책자로서 동 책자 내용에는 실정법상 위반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시판될 경우 정국 안정에 위해롭고, 이를 묵인할 경우 유사내용 책자 제작판매가 우려되므로 유죄선고토록 협조 요청(조정)”하여 그들로부터 “최대 협조 다짐”을 받았다. 안기부는 이때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도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판매한 혐의로 즉심에 회부된 책 도매상 진명서적의 영업부장인 이규만씨 사건과 민통련의 ‘불순성명’ 제작과 관련하여 즉심에 회부된 같은 단체의 민생분과 이부영 위원장과 실무자 오경열씨 사건에 대해서도 ‘협조’를 요청했다. 이 보고서는 수석부장판사 박만호가 사건 담당 조재연 판사가 즉심에 들어가기 직전 “동 책자에 수록된 이철 의원 발언 중 광주사태 부분이 시중에 유포되면 유언비어가 되어 사회안정에 유익한 것이 못 되며 유무죄는 정식재판에서 논하도록 하고 즉심에서 유죄 인정 구류 선고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수석부장판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즉심 담당 판사 조재연”은 “국회의사록이 일반에게 반포됐다 해서 허위사실 날조 유포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떤 판결을 내릴지에 대해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한 뒤 법정에 들어가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무죄를 선고”해버렸다. 당시 <중앙일보>는 조 판사가 “국회의원의 발언을 수록, 편집한 것만 가지고는 유언비어 유포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조 판사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전국의 서점에 배포한 이규만씨에 대해서도 “책장사라는 정상 참작, 형면제를 선고”했다. 다만, 민통련의 성명 관련자인 이부영 위원장 등은 “사안이 중하다는 이유로 검찰 송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정형근 수사단장 보내 강력 항의
이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을 안기부의 서울형사지법 담당 조정관은 “무죄선고 즉시 서울형사지법원장 및 수석부장판사에게 강력 항의”하여 법원장 등이 “면목 없다”며 “향후 대책수립 적극 협조 다짐”을 했다고 썼다. 당시 조정관들은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자신들의 조정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심했다. 아무리 법원장과 수석부장이 정권에 ‘협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법원장이 일개 조정관에게 “면목 없다”라고 했을 리는 없다. 이 보고서는 안기부가 ‘수사2단장’을 보내 형사지법원장 및 수석부장을 “직접 방문”하여 “엄중 항의”하고, “담당 판사에 대해 엄중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안기부 내부 보고서인지라 이름 없이 직함만 썼지만, 당시의 수사2단장은 정형근이었다. 안기부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대공수사2단장을 법원에 보낸 것은 같은 법조인을 보냄으로써 법원을 나름대로 ‘예우’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법원의 독립성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안기부의 엄중 조치 요구에 대해 박만호 수석부장은 “향후 여사 사례 없도록 책임지고 자체 대책을 충분히 강구하겠으니 담당 조재연 판사에 너무 힐책 말아주길 요망”했다고 한다. 법원 쪽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조재연 판사에 대해 ‘조치’에 들어갔다. 보고서는 안기부가 “담당 판사 조재연”에 대해서는 “비위 내사, 견제 자료 확보” 조치를 취하고, “여타 비협조 판사들에 대한 비위자료” 역시 “집중 수집”키로 했다고 결론지었다.
조재연 판사의 인사이동 기록 등을 보면 다행히 별다른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박시환 판사에 대한 인사파동으로 유태흥 대법원장 탄핵안이 발의된 상황에서 안기부나 법원이 조재연 판사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즉심과 관련한 안기부의 사전 ‘조정’이나 사후 ‘조치’가 담당 판사에게 직접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에게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다수 판사들은 법원 상부에서 오는 압력은 많이 받았으나 그것이 법원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법원 상부 선에서 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압력
대법원장 유태흥에 대한 탄핵안의 국회 표결을 앞둔 1985년 10월 10일에도 서울형사지법에서 시위 물품을 운반하다 적발된 여대생을 즉심에서 무죄로 방면한 일이 발생했다. 이에 안기부는 <서울대 여학생, 시위준비물 운반 등 관련 즉심 무죄선고 경위확인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IMF, IBRD 총회 반대 가두시위설에 대비 경계근무 중” 광화문 앞에서 메가폰과 시너 1ℓ가 든 상자를 갖고 있던 서울대 여학생 박현주 등 2명을 불심검문으로 적발하여 연행 조사했다. 이들은 수배 중인 서울대 인문대 여학생회장 최미숙에게서 시위 용품의 운반을 부탁 받았다가 적발되어 “경범죄처벌법(제1조 4호: 폭행 등 예비) 위반으로 즉심회부”되었다. 그런데 담당 김대휘 판사는 피의자 등이 시위에 참석하려다 실패한 것은 경범죄처벌법상의 예비음모에 해당하지만 “단순히 메가폰 등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 해를 입히기 위해 공모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 판사는 서울민사지법에서 근무하다가 한 달 전인 1985년 9월 서울형사지법으로 전보되었고, 즉심은 네 번째 맡았다. 안기부는 김 판사의 성향을 “온순 단정, 정부시책에 협조적”이라고 파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박만호는 담당 판사를 불러
»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피의자들의 행위는 경범죄처벌법 입법정신에 충분히 합당, 유죄선고를 해야 했다’고 주의를 환기”했고, 김대휘 판사는 “차후 유사 사례 없도록 잘 살펴서 판결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황선당 서울형사지법원장에게 “향후 유사한 사례 재발치 않도록” “협조”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 법관은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씨가 귀국할 때에 환영벽보를 붙이다 아주머니 한 명이 잡혀왔는데,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이 전화로 구류 20~29일 이상 살리라고 지시하자 지원장이 전화기를 집어던지며 화내는 모습을 봤다고 회고했다. 이 사건은 그저 과태료 4500원이나 구류 3일이면 충분한 사건이었다. 서울의 어떤 지원장은 젊은 판사들을 모아 놓고 사정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 바로잡습니다
10월6일치 국가모독죄 관련 기사에서 유신정권은 날치기로 국가모독죄를 제정했지만 “막상 이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다”고 썼습니다. 이에 대해 1975년 3월 동아일보 사태로 해직된 이부영 전 의원은 1975년 6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국가보안법·긴급조치 위반, 그리고 국가모독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국가보안법 15년 구형에 8년, 긴급조치와 국가모독죄 3년 구형에 1년을 선고받았다고 밝혀왔습니다. 이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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