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흥 대법원장 ‘뇌물 의혹’ 판사에 사표종용
해당 판사들 “보석 결정 정당했다” 강력 반발
대법 ‘자진사퇴’ 언론플레이, 지방발령 ‘압박’
박준용 판사, 사표 내자마자 안기부 끌려가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9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 (2)
내지도 않은 사표를 제출했다고 보도
강건용 비서관의 뇌물사건은 김재규를 신군부의 뜻대로 처리해 대법원장 자리를 꿰찬 유태흥에게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 20여년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크게 의존해 온 최측근 인물이 5공화국 출범 이후 최대의 공직자 비리 사건의 주인공이 됨에 따라 유태흥의 거취까지 권력 심층부에서는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 온갖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유태흥은 신병을 핑계로 며칠간 출근도 하지 않았다. 1월26일에 가서야 대법원 청사에 나타난 유태흥은 외화 밀반출 사건 피의자들에게 보석을 허용한 박준용·정명택 부장판사를 불러 사표를 종용했다. 1월28일 석간신문부터 언론은 부장판사 2명이 ‘돌연’ 사표를 제출했고, 이들의 사표는 금명간 수리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언론은 이들이 강건용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사실은 없지만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도의적 책임으로 ‘자진해서’ 사표를 제출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일부 신문은 “두 법관의 사의 표명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뒷소식을 덧붙였다.
언론은 두 법관이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이들은 아직 사표를 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런 보도가 나간 것은 대법원이 사표 요구에 반발하는 이들을 압박하려고 언론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들은 이런 보도에도 완강히 사표 제출을 거부했다. 금품을 수수한 사실도 없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보석 요건을 갖춘 자들에게 보석을 허락했을 뿐인데 사표를 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대법원은 1월31일 오후 전격적으로 박준용 부장판사는 강경지원장으로, 정명택 부장판사는 장흥지원장으로 발령을 내는 등 법관 39명에 대한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원래 법관의 정기인사는 3월 초에 단행되는 것인데 두 부장판사의 문제로 법관 인사가 한 달이 넘게 빨라진 것이었다. 박준용, 정명택 두 부장판사는 1982년 9월에 현직으로 전보되었기 때문에 83년 봄 정기인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들을 좌천시켜버린 것이다. 원래 법관에 대해서는 신분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사표를 내라 말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법원은 식당에 갈 때도, 등산을 할 때도 서열순으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열을 중시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서열을 무시하고 좌천시킨다는 것은 곧 본인에게 알아서 사표를 내라는 뜻이다. 그러나 두 부장판사는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보석 청탁과 관련하여 강건용 비서관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좌천 인사는 매우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표 강요 막기 위한 사표 제출?
인사가 발표된 다음날인 2월 1일, 박준용 부장판사는 결국 사표를 썼다. 박준용 판사는 대법원장 유태흥이 대법원 판사 시절 그 밑에서 재판연구관을 지냈기 때문에 대법원장과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엉뚱하게도 사의를 표명했다는 말이 대법원에서 흘러나와 일부 신문에 보도됐을 때까지만 해도 함구로 일관”했지만, 좌천 발령이 나자 사표를 던지며 말문을 열었다. 당시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준용 부장판사는 객관적으로 보석을 허가해 줄 만한 사유가 있어 보석을 허락한 것인데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지난달 26일 대법원장으로부터 사표를 종용받았으나 책임이 없기 때문에 물러날 수 없다고 버텨 왔다”고 밝혔다. 그는 대법원이 자신을 “지방으로 좌천시킴으로써 결국 사표를 강요”하고 있다며, “사법부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법관에게 사표를 강요하거나 좌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표를 내기로 했다”고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언론, 특히 <동아일보>는 ‘법관 인사의 파문’이라는 사설에 이어 ‘기자의 눈’ 난을 통해 박준용 부장판사가 사표를 쓰는 광경을 생생하게 전했다. 1월31일 오후 늦게 박 부장판사 등의 좌천 인사가 발표되고 “부장은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쓰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동료 및 후배 법관들이 사표 만류 겸 위로 겸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박 부장판사의 방에서 “다른 공무원들의 억울한 파면을 재판하면서 ‘무슨무슨 장관의 아무개에 대한 파면 처분은 재량권의 한계를 이탈한 것이므로 그 파면 처분을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문을 쓰는 판사가 자신은 부당하게 사표 제출을 종용당하고 결국 지방으로 쫓겨가다니…” 등등의 자조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 법관들이 “부장님! 지금 그만두시면 더욱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동안 지방에 내려가 바람이나 쐬고 오시지요”라고 만류했지만 “박준용 부장은 결국 사표를 썼다”고 한다.
박준용 부장판사가 2월1일 사표를 낸 데 이어 정명택 부장판사도 2일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전출법관 또 사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 부장판사의 말을 인용하여 “이번 인사에 승복할 수 없어 사표를 낸 것”이며 “관련 피고인에게 보석을 허가해 준 것은 외부의 청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안을 면밀히 검토해, 법률과 양심에 따라 해준 것 뿐”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신문은 “한편 사표를 낼 뜻을 밝혔던 서울지법 남부지원 정 부장판사는 사표를 내지 않고 장흥지원장으로 3일 부임했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흥지원장으로 부임한 그는 한 달 반가량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3월18일 사표를 제출하여 21일자로 수리되었다.
사표 내자 안기부로 연행
그런데 정명택 부장판사가 사표를 낸다고 말했다가 이를 번복한 것은 그를 위해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사표가 수리된 박준용 ‘전’ 부장판사가 안기부로 연행된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확보한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안기부는 이 사건으로 검찰과 갈등을 빚은 뒤 재조사에 들어가면서 “관련자 수사”에 대하여 “검사, 판사 등 현직 관련공무원을 제외”한 “변호사, 중요피의자 및 그 가족 등 총 21명 조사”하였는데, 박 부장판사는 1983년 2월2일자로 사직하였다는 이유로 ‘현직’ 법관으로 간주되지 않고, “현 변호사 개업”이란 이유로 연행자에 포함되어 본 보고서가 작성된 시점까지 “연행 조사 중”에 있었다. 박준용 ‘전’ 부장판사가 연행된 시점은 보고서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그가 사무실을 얻고 상당한 비용을 들여 주요 일간 신문에 석간은 2월 16일자, 조간은 2월 17일자로 1면에 2단 박스광고로 “변호사 개업인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월 17일께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명택 부장판사는 사표를 내지 않은 까닭에 이 보고서가 작성될 시점까지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지 않았다.
안기부는 이 보고서에서 “본 사건과 관련 강건용이 3000만원의 금품을 받고 재판부 작용(이미 확인)”이라고 하여, 두 부장판사가 강건용 비서관의 청탁을 받고 보석을 허가해 준 것처럼 기정사실화하였다. 그러나 보고서 어디에도 두 부장판사와 강건용 비서관 사이에 금품수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안기부는 두 부장판사가 변호인들로부터 휴가비 명목으로 20만~30만원을 받았고, 12만원 상당의 골프 대접을 받았으며, 마작 밑천으로 10만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안기부는 이런 휴가비 제공이나 접대가 이루어진 시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만약 이 시점이 두 재판장이 각각 보석을 허락한 이후였다면 변호인들의 금품 제공과 보석 결정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들 두 부장판사가 피고인의 담당 변호인으로부터 사후에라도 금품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고도의 염결성이 요구되는 법관의 윤리기준에 비추어 문제가 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금품을 받고 보석을 결정해 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나름대로의 근거는 있었던 것이며, 학연과 고시 선후배로 얽혀 있는 법조계의 당시 관행에 비추어 정상참작의 여지도 있었다 할 것이다. 안기부 보고서에 이들과 같이 골프를 치고 마작 밑천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 다른 판사들은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변호사 개업도 못하게 해
박준용 변호사는 안기부에서 풀려난 후 “일신상의 이유”로 3월8일 변호사 휴업계를 소속 변호사회인 서울통합변호사회에 제출했고, 그의 휴업계는 이날자로 대한변호사협회에 접수·처리되었다. 한편 3월20일자로 퇴직한 정명택 부장판사는 “28일 현재 (변호사) 개업등록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 조선닷컴 인물정보에 의하면 두 부장판사가 각각 변호사 개업을 한 것은 1984년으로 되어 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검찰의 경우도 담당검사와 부장검사 등 2명이 파면되고 이창우 서울지검장과 조용락 남부지청장이 지휘 책임을 지고 ‘의원면직’되었다. 이창우 서울지검장은 농장을 경영하다가 1990년에야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고, 조용락 남부지청장도 1983년에 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내지 못하고 1984년에야 사무실을 열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법관들이 외압에 눌려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내렸을 때 “나쁜 XX들, 사표 내고 변호사 하면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는데 저런 짓을 하고 있다”고 욕을 한다. 그런데 훨씬 더 나쁜 XX들은 겁 많은 판사들이 변호사 개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억울하게 사표를 쓰고 변호사 개업 광고까지 냈다가 안기부에 잡혀가 고초를 겪고 휴업계를 내야 했던 동료 법관들을 보면서 5공화국의 법관들은 유신 시절의 법관들보다 더 길들여져 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검찰마져 안기부에 '무릎' .... 위계질서 '깔끔하게'정리
안기부, 외화밀반출 사건 재수사
담당검사 2명 뇌물수수 ‘약점’ 잡아 ‘대쪽’
이창우 서울지검장도 옷벗겨
'힘의 균형’ 깨지고 다시 독주체제로
» 5공화국의 역대 안기부장들. 왼쪽부터 유학성(1980.7~82.6), 노신영(~85.2), 장세동(~87.5), 안무혁(~88.5)씨. 왼쪽 사진은 삼청각 전경. <한겨레> 자료 사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0.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 (3)
안기부, 검찰의 가혹행위 조사
안기부는 대법원장 비서관의 뇌물 사건을 트집 잡아 부장판사 2명의 옷을 벗겼지만 진짜 표적은 검찰이었다. 안기부의 보고서는 안기부가 1983년 2월 12일 외화 밀반출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의 부당사항에 대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는 검찰 수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안기부는 검찰이 “돈 없는 서민은 학대, 가혹, 고문”하고 “돈 있는 범법자는 우대”하여 일부 피의자들에게 물고문과 구타를 한 반면, 이경자 등에게는 과도한 특별대우를 해 주었다고 비난했다. 강건용 비서관에게 가해진 안기부 조사관들의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진상을 극히 축소했던 안기부는 검찰에서 가해진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마치 인권단체의 보고서처럼 자세하게 그 내용을 서술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검찰은 54세의 여성 암달러상에게 “런닝샤스, 팬티만 입게 하고 나무 의자에 눕혀 2명이 팔을 잡고, 1명은 배 위에 올라앉아 물에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고, 주전자의 물을 붓는 행위 2회 반복”했고, “무릎을 꿇리고 각목(1미터)으로 팔, 다리, 허리 등 10여회 구타”했다. 잠적해버린 다른 암달러상의 경우, 남편을 잡아다가 부인의 은신처를 대라며 “긴 의자에 눕혀 양손을 뒤로 하여 수갑을 채운 채, 1명은 배 위에 올라앉고, 1명은 겨자물을 묻힌 수건을 얼굴에 덮고 주전자(2ℓ) 물을 먹임, 1명은 전신과 양발바닥 수회 구타”했다. 검찰은 그가 두 차례나 실신하자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뒤 왼손을 유리창 창살에 수갑을 채워 묶은 채 밤을 새우게 했으며,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조사가 끝난 후에도 방면하지 않고 14일간 여관 3곳을 전전하면서 치료한 뒤에야 풀어주었다. 안기부는 검찰 조사관이 대원각 주인인 이경자에 대해서는 그가 임신하지 않았음에도 “뭐 아주머니 많이 된 것 같애요. 똑바로 대(큰소리)”라고 임신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여 조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담당 검사는 진단서를 받지 않고 임신한 것으로 인정하고 변호인이 임신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하자,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검사는 검사실에서 이경자와 가족들의 특별 면회를 허락하고 조사 초기에는 “이× 저×” 하다가 나중에는 “대원각 놀러 가면 만날 수 있느냐?”며 감방도 좋은 감방으로 이감해주는 등 특별대우를 했다고 한다.
안기부 조사에 따른 검찰의 전면 재수사
안기부 보고서는 담당 검사-부장검사-남부지청 차장-남부지청장-서울지검장 등 수사상의 지휘계선에 있는 검사 5명의 명단을 적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담당 검사가 625만원의 거금을 이경자의 변호인과 가족들로부터 뇌물로 받았고, 담당 부장검사는 133만원, 서울지검장은 45만원의 금품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안기부가 법원 관련자 4명이 받았다고 주장한 금품이 92만원인 것에 비하면 뇌물의 규모가 매우 컸다. 안기부는 검찰이 사건 관련자들을 뇌물을 받고 관대히 처리했다면서, 국세청 요원 112명과 안기부 채증반을 동원하여 이경자 등의 “반사회적, 반국민적 행위 응징을 위한 특별세무조사 및 가택 수색”을 실시했다. 안기부는 “외화 은닉 및 범칙 물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세무조사 결과 예상 추징금만 약 1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탈세가 이뤄진 사실은 확인했다.
안기부는 이런 조사 결과를 검찰에 이첩했고, 대검 중앙수사부는 1983년 2월 26일 외화 밀반출 사건의 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경자의 남편 이태희 등 5명이 뇌물 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대원각과 삼청각의 여주인인 이경자, 이정자 자매 등도 다시 불구속 입건되었다. 검찰은 변호사들로부터 금품을 받은 남부지청 이진록 검사와 당시 부장검사인 동부지청 차장 박혜건 검사가 이 날짜로 징계면직(파면)됐다고 발표했다. 이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변갑규, 나정욱, 윤태방 등 변호사 3인은 법무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변호사 징계위에서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진록 검사와 박혜건 부장검사가 받은 금품은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각각 625만원과 133만원이었는데, 검찰은 이진록 검사가 155만원, 박혜건 검사가 130만원이라고 안기부 보고서보다는 적은 금액으로 발표했다. 외화 밀반출 사건의 재조사와 기소는 처음 중수부에서 이 사건을 맡아 강건용 비서관에 대한 고문을 문제 삼아 안기부와 검찰의 갈등을 빚은 성민경 2과장이 아니라 신건 4과장이 담당했다. 그러나 안기부의 가택수색 날짜와 사건 이첩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2월 26일 대검 중수부가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 독자적인 수사를 할 시간은 거의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안기부, 검찰을 짓밟다
안기부는 검사 2명의 파면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외화 밀반출 사건으로 야기된 검찰과의 갈등에서 안기부는 이 기회에 확실히 검찰의 기를 꺾어야 한다고 본 듯싶다. 안기부의 보고서는 늘 그렇듯이 주변의 여론이라며 자기의 속내를 적고 있다. “본 사건 처리 관련 법조계 여론: △제5공화국 출범 이래 검찰의 부정은 상존하고 있다는 국민 여론을 감안 이번 기회를 검찰의 비리척결 계기로 삼아야 한다(일반검사) △불똥이 어느 정도 튈지는 모르지만 검찰이 지금까지 검사 비위에 대하여는 미온적으로 처리해왔음을 감안 이번 기회에 정신 못 차리는 검사들을 정화적 차원에서 과감히 쇄신해야 된다(검찰 일부) △이번 수사로 검찰의 비리 소지가 완전히 척결되기를 희망한다(변호사)”
안기부가 특히 문제 삼은 것은 이창우 서울지검장이었다. 안기부는 “사건의 엄정처리 지휘책임자인 검사장이 말단 사건 담당검사를 초청, 피의자 남편 이태희와 같이 골프”를 쳤는데 이는 “통상의 검찰 윤리 및 위계질서상 있을 수 없는 일로 평가”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태희로부터 호텔 숙박 티켓 1매(20만원)를 수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창우 검사장은 중앙정보부원 출신인 이태희와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이태희는 동창회 총무와 함께 이 검사장을 찾아와 동창회 기금 1천만원을 내는 조건으로 부인 등의 기소유예를 청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안기부가 문제 삼은 골프모임은 이경자의 형이 확정된 10월 18일로부터 2주일가량이 흐른 뒤의 일이고, 문제의 호텔 숙박권 역시 형 확정 이후에 건네진 것이다. 이런 숙박권을 받거나 피의자 가족과 골프모임을 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할 수 없지만, 대가성이 있는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이창민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진짜 문제는 안기부가 이 호텔 숙박권을 이창우 서울지검장의 방을 몰래 뒤져 찾아내 이를 근거로 이창우 검사장의 면직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점이다. 결국 검찰은 3월 29일자로 이창우 서울지검장과 조용락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이 지휘책임을 지고 ‘의원면직’ 형식으로 옷을 벗는 것으로 처리했다. 지휘계선에 있었던 인물 중 박희태 남부지청 차장만 요행히 안기부의 칼날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는 “서울지검의 많은 검사들은 이창우 검사장의 퇴임을 두고 ‘이 검사장은 부하 검사들이 일하기 쉽도록 많은 뒷받침을 해줬다’면서 안쓰러워했다”고 보도했다. 이창우 지검장은 평소 청와대에 파견나간 후배 검사로부터 청탁성 전화가 오면 호통을 치면서 전화를 끊어버리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창우는 “평검사 시절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동백림 사건(67년 7월)을 처리했고,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거친 정통 공안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대쪽 같은 성격의 원칙론자”로 서울지검장이 되기 전 1981년 4월부터 1982년 6월까지 대검 공안부장을 지냈다. 그때 “전민학련 사건(81년 9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82년 3월) 등 시국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강경 일변도인 안기부 측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검 공안부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검찰 내부에서 받는 등 후배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이창우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안기부의 미움을 사서 외화 밀반출 사건의 지휘책임을 지고 옷을 벗고 말았다. 이창우는 퇴직 후 농사나 짓겠다며 시골로 내려가 1990년이 되어서야 변호사 개업을 했다. 남부지청장 조용락 역시 두 부장판사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없었다. 한편, 강건용 비서관에 대한 안기부의 가혹행위를 처음으로 문제 삼은 성민경 대검 중수부 2과장은 다른 3명의 중수부 과장들이 검찰총장급으로 승진한 반면, 혼자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뒤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파면된 두 검사와 뇌물공여로 제명처분을 받은 세 변호사는 법에 따라 3년간 변호사 자격이 제한되었다가 안기부가 ‘아량’을 베풀어 2년 만에 복권되었다.
안기부 전성시대
소장 법관도 아니고 유신의 암흑시대를 살아낸 경력 15년 안팎의 부장판사 2명이 옷을 벗은 법원은 완전히 안기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두 명이 파면당하고, 검사장과 지청장이 옷을 벗은 검찰의 충격은 법원보다 더 컸다. 당장 대검에 감찰부가 신설된 것을 두고 국회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땅에 떨어진 검찰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벌였다. 공안이나 시국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사법경찰관 부서인 안기부에 의해 완전히 뒤집힌 것은 검찰 역사상 초유의 치욕이었다. 검찰이 “자체 비리가 있다는 약점”이 안기부에 잡혀 완패한 것을 두고 이창민 기자는 이 사건은 “이후 계속된 시국·공안사건에서 안기부에 눌리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며, “안기부가 법조계를 견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사건은 한 검찰 고위관계자의 평가처럼 “그때까지 팽팽하게 맞서왔던 안기부와 검찰의 힘겨루기 게임에서 안기부가 검찰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계기를 만든 분수령”이었으며, “5공 중반기 이후 안기부가 권력의 중추기관으로 재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여파”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