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사는 기성의 정치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하는 사림파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성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기존에 정치적ㆍ사회적 특권을 향유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특히 이들은 언관이나 사관과
같이 비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의 기득권 비리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사림파의 맹장 중에 바로 김일손이 있었다.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며 소장 영남 사림파의 리더로 활약했던 김일손은 언관과 사관으로 있으면서 기성의 잘못된 정치 형태를 고발하려 했다. 이것은
그가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싣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록의 편집이 끝나면 세초(洗草-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사초를 없애는 일)를 하여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인
그의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정치적 참극이 일어났다.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의 서막을 연
사건이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이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김맹(金孟) 역시 가학을 계승하고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김일손 가문은 정통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셈이 된다. 어린
시절 김일손은 부친을 따라 용인에서 살았으며, 이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학]은 사림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영남사림파의 대표학자 김굉필(金宏弼)은 ‘소학동자’로 까지 지칭되었다. 15세에는 단양 우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이해 고향 청도를
거쳐 선산에 사는 정중호(鄭仲虎), 이맹전(李孟專)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예조의 복시(覆試)에는
실패했다.
17세 때 고향에 돌아온 김일손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있는
밀양으로 가서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부친 김맹의 [효문명(孝文銘)]에서 청도에서 올라온 김극일의 두 아들
김기손(金驥孫)과 김일손을 가르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은 지리산을 다녀온 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김일손 역시 1489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지리산을 사랑하고 기행문을 남긴 것 또한 스승과 제자가 하나였던
셈이다. 밀양에 살던 김종직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인연은 김종직의 사후 때까지 끈끈하게 이어진다.
김일손은 23세가 되던 1486년 청도군학(淸道郡學)으로 있으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다. 생원시는 장원,
진사시는 차석이었다. 이해 가을의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던 최부, 신종호, 표연수도 함께 급제하였다. 1487년 김일손은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진주목사와
진양수계(晉陽修稧)를 조직하였으며,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이후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490년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교정하고 증보(增補- 모자란 내용을 보탬)했다. 소릉(昭陵-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조처로서,
나아가서는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일손에 대해서는 무오사화의 대표적인 희생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관으로서의 그의 강직한 면모만이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망하고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개혁책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실록이나 그의 문집인 [탁영집(濯纓集)], 그의 조카인 김대유의
[삼족당집(三足堂集)]등의 기록에는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김대유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쓰면서 김일손의 호매하고 강직한 성품과 함께
경제지책(經濟之策)을 품고 있었음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실록에서 그가 제시한 여러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인사정책에 대해서는 효행과
염치가 뛰어난 자와 재질이 훌륭한 종실(宗室- 왕족)의 등용, 천거제의 충실한 활용 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조광조 일파가 주장한 천거제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또한 언관의 활동 보장과 지방관의 사관 발탁 등을 건의하여 언론권의 강화를 주장하였고, 법전을 지방 관아에서 충분히 활용할
것, 사원전과 서원 노비의 혁파 등을 건의하였다. 국방대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문관을 뽑아 변방의 장수에 제수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방비할 것을
제시하고 당시 충주나 웅천에서 있었던 왜인들의 소란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에도 왜구들의 소요가 계속
일어났고 1592년 임진왜란까지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선견지명을 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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