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려진 다음날인 18일 일요일 오전 전남대생 200여명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계엄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지극히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진압은 경찰과는 차원이 달랐다. 달아나는 학생을 붙잡기 위해 민가에 무차별로 들어와서 뒤지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했다.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인 금남로로 진출하고 이것이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 되었다.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자 공수부대도 시내로 투입되기 시작한다. 공수부대는 무력 진압을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 까지 무차별 곤봉 세례를 가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금남로로 계속 모이기 시작한다. 19일 오전 2000~3000명으로 늘어난 시민들은 군경과 대치한다. 도청 앞과 금남로에 투입된 공수부대 1000여명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구타한다.
20일 오후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시민 10만여명이 금남로에 모인다. 이날 공용터미널에서 공수부대원들에 의한 첫 사망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날 밤 11시께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의 첫 발포가 가해진다.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를 가한다. 시민들 수십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금남로는 피로 붉게 물든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한다. 거센 항쟁에 밀려 공수부대는 시 외곽으로 퇴각한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5월 27일 새벽 1시30분을 전후로 공수부대는 시내 주요 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한다. 탱크 지나가는 소리와 총성이 광주의 밤하늘을 찢었다. 새벽 4시 도청을 목표로 공수부대의 시민군 말살 초토화 작전이 전개 된다. 도청을 사수하려던 최후의 시민군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광주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린다. 생존자들은 모두 군부대로 끌려가고, 강요된 침묵속에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진실의 왜곡이 자행된다.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진압은 경찰과는 차원이 달랐다. 달아나는 학생을 붙잡기 위해 민가에 무차별로 들어와서 뒤지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했다.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인 금남로로 진출하고 이것이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 되었다.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자 공수부대도 시내로 투입되기 시작한다. 공수부대는 무력 진압을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 까지 무차별 곤봉 세례를 가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금남로로 계속 모이기 시작한다. 19일 오전 2000~3000명으로 늘어난 시민들은 군경과 대치한다. 도청 앞과 금남로에 투입된 공수부대 1000여명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구타한다.
20일 오후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시민 10만여명이 금남로에 모인다. 이날 공용터미널에서 공수부대원들에 의한 첫 사망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날 밤 11시께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의 첫 발포가 가해진다.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를 가한다. 시민들 수십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금남로는 피로 붉게 물든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한다. 거센 항쟁에 밀려 공수부대는 시 외곽으로 퇴각한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5월 27일 새벽 1시30분을 전후로 공수부대는 시내 주요 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한다. 탱크 지나가는 소리와 총성이 광주의 밤하늘을 찢었다. 새벽 4시 도청을 목표로 공수부대의 시민군 말살 초토화 작전이 전개 된다. 도청을 사수하려던 최후의 시민군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광주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린다. 생존자들은 모두 군부대로 끌려가고, 강요된 침묵속에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진실의 왜곡이 자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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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곤봉 세례를 가한 후 속옷 차림으로 군용 트럭에 태워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연행된 시민들에게는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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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물러간 이후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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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건너편 상무관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관(왼쪽)과 5월 27일 새벽까지 항전하다 체포돼 무릎 꿇린 채 엎드려 있는 시민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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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망월동 묘지에서 합동 장례를 치르기 위해 운반되는 희생자들의 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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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희생자들의 관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에 왔다.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 속에 나이어린 상주의 모습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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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암울한 시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 조차 경찰의 방해로 열리지 못했고 일반 국민들은 5.18묘지를 참배 하는 것마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84년 열린 4주기 추모식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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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눈에 덮인 망월동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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