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의 회상 인간 김대중] “한 변호사 유머집 내 활동자금 좀 법시다”
한승헌 변호사.경원대 석좌교수ㅣ
40년의 인연. 한승헌 변호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 묘비 제막식이 열린 6일 고인과 함께한 시간을 되돌아봤습니다. 한 변호사는 엄혹했던 군부 독재 시절에는 변호인으로서, 국민의정부 때는 국정의 동반자로서 김 전 대통령과 인고와 영광의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그간 여러 권의 저서에서 미처 적지 못했던 고인과의 인연과 인간적인 면모를 특유의 유머스러운 필치로 담아냈습니다. 세차례 나눠 실립니다.
‘유머 책 내서 돈 좀 벌자.’
김대중 대통령(이하 ‘디제이’)은 카리스마도 대단하신 분이었다. 정당의 간부 등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지식인이나 사회 명사들도 그 앞에서는 ‘작아지는’ 수가 많았다. 그 점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 경솔한(?) 언론이 나를 소개할 때, 디제이와 몇 시간씩 담론을 한다느니,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라느니, 터놓고 농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느니, ‘무엄한’ 소리를 하는데, 그건 결코 아니었다. 1998년, 내가 김대중정부의 감사원장으로 임명되자 여러 언론들이 나를 치켜올리느라고 한 소리였다. 그런데 지난번 김 대통령 국장·조문기간 추모 방송 또는 관련 기사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그 일부를 재탕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했다.

1986년 5월 DJ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영산홍이 만발한 서울 근교 석화촌에서 부부 동반으로 모처럼 시간을 함께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한 변호사.

1986년 5월 DJ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영산홍이 만발한 서울 근교 석화촌에서 부부 동반으로 모처럼 시간을 함께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한 변호사.
단지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분 앞에서도 유머를 활용해서 좌중을 웃긴 적이 종종 있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디제이는 오히려 심심해하거나 궁금하다는 듯이 ‘오늘은 뭐 유머 좀 없느냐’고 하시기도 했다.
그분이 야당 총재시절, 한번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우리 활동자금도 궁하고 하니, 누가 수첩 들고 한 변호사 뒤를 따라다니면서 유머를 받아 적어가지고 출판을 하자. 그래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돈 좀 벌면 좋겠다.”
대통령이 되신 뒤에도 면전에서 유머를 구사(?)하여 즐겁게 해드린 적이 몇 번 있다.
디제이의 포용정책, 조수미의 포옹정책
디제이는 2000년 12월에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라서 그 의미는 더욱 컸다. 나의 기쁨은 유머로 진화되어 오슬로 현지에서 일행을 웃겼다.
수상자인 디제이를 모신 일행이 전용기 편으로 노르웨이에 갈 때 나도 한축에 끼여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시각이 오후 3시였는데,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곳 날씨는 일년 내내 흐리기만 해서 햇볕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바로 이런 곳에서 노벨평화상 심사를 하게 되었으니, 위원들이 ‘햇볕정책’에 반색을 하고 디제이를 수상자로 결정했을 것이다. 이건 현지에서 내가 일행들 앞에서 발표한 ‘수상 이유’였는데, 모두가 노벨상에 감격해서 ‘용비어천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잠시 별미로 요리해 본 말이었다.
시상식이 있던 그날 저녁,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어떤 공간에서 축하 공연이 열렸다. 세계적인 가수 등 연예인들이 화려한 무대를 누비는 자리였는데, 한국인으로는 조수미씨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그는 장내를 휘어잡듯이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고 나서 마침 무대 왼쪽에 잠시 나와 있던 디제이에게 다가가더니, 서슴지 않고 뜨거운 포옹을 좌우로 퍼부어 장내의 박수를 받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일행의 ‘소감 발표’가 있었는데,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조수미씨가 해외에서 오래 살더니, 디제이의 ‘포용정책’을 ‘포옹정책’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이나 대신 받아 오라고
감사원장을 정년으로 임기 전에 ‘조퇴’하고 법무법인 광장으로 가서 일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2002년 정초였다.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이란 단체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여하는 ‘민주주의 수호자상’을 나보고 대신 가서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청와대 측에 나는 한 마디 했다. “충신은 주군을 대신해서 목숨을 바친다는데, 나보고는 상이나 대신 받아오라는 것을 보니, 내가 충신이 아닌 것은 확실하군.”
어쨌든 나는 시상식이 열리는 스톡홀름을 행해 떠났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17년 동안 근무한 국제통인 박경서 박사와 동행했다.
김 대통령께서는 그 전 해 겨울(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오슬로를 다녀오신 터여서 또 무슨 상을 타기 위해서 나라를 비우고 장거리 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출국하기 전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그런 사정을 주최 측과 내빈들에게 잘 양해시켜 달라는 당부를 하셨다.
시상식에서 나는 ‘수상자 인사’를 대독하기 위해서 청와대에서 준비해준 연설문을 여러 번 읽고, 오디션을 통하여 발음을 교정 받는 등 사전 연습을 했다. 간 김에 스웨덴 감사원장도 만났다. 지난 겨울에 이어 두 번째 스톡홀름 방문이라고 했더니, 왜 추운 나라에 추운 겨울에만 오느냐고 웃으면서 묻는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 대통령께서 국제적인 큰 상을 하필이면 겨울에만 받으시니, 난들 어떻게 합니까?”<한승헌 변호사.경원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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