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검찰, 박정희 정권 불편함 덜어주려 사법부 수사”
“중앙정보부 아닌 공안검사가 주도한 듯”
홍성우·최영도·목요상 판사 밝혀
검찰 인책 등 없이 ‘파동’ 허무한 결말
“박정희, 사태 계속 땐 계엄 선포하려 했었다”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 8 화 - 사법파동 (하)
수습을 위한 모색
사법파동의 양상이 점차 법원과 검찰의 대립으로 치달아가자 법원 내에서는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부산에서 돌아와 법무부 장관을 만나보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대법원장 민복기는 7월 31일 백두진 국회의장이 주최한 8대 국회 개원 자축연에서 “근일 내로 박 대통령을 만나 근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정희는 민복기를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박정희는 법무장관 신직수를 불러 “이 이상 판사들의 독직사건에 대한 수사나 소추를 하지 말고 대법원장을 찾아가 이번 사건은 민 원장이 알아서 처리하게 맡기라”고 지시했다. 신직수는 8월 1일 검찰총장 이봉성과 함께 민복기를 찾아가 박정희의 뜻을 전했다.
다음 날 민복기는 서울민·형사지법원장을 불러 대통령 면담 때까지 판사들의 동요를 막아 달라고 당부한 뒤, 대법원 판사회의를 소집했다. 7시간여의 마라톤회의를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민복기는 “민사지법판사들이 낸 7개항의 건의문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사법부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현재 면담을 신청중”이라면서 이제 “남은 것은 사법권을 보장하는 문제만이므로 직접 대통령을 만나 우리 실태를 말하고 그분의 용단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곧 있을 대법원장의 대통령 면담 시기에 관심을 모으며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화당 주변에서는 박정희가 법무부 장관을 통해 대통령의 뜻을 대법원장에게 이미 전달하였기 때문에 대법원장 면담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법원장의 대통령 ‘알현’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법무장관 신직수가 국회에서 이번 사태를 깊이 반성하며 사법부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변했을 뿐이다.
민복기는 이 답변을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받은 것으로 본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서울민·형사지법 판사들은 신직수의 국회 발언 내용을 녹음으로 듣고 난 뒤, 대법원장의 수습방안은 지법판사들의 요구사항과는 거리가 있다면서 법원 고위층의 미온적인 사법파동 수습을 관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 면담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자 법관들은 8월 9일 다시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검찰 관계자 6명의 인책사퇴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자 검찰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8월 10일 서울지검 검사들은 이범렬 부장판사에 대한 사건을 백지화하였는데도 판사들이 검찰 관계자들의 인책을 요구하는 것은 사법이 검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부산지법 법관 12명은 8월 10일 사표를 제출하는 등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사법파동이 다시 타오를 조짐을 보였다.
국회에서의 논란
박정희는 “사법파동이 장기화되었더라면 계엄을 선포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사법파동은 7월 26일 개원한 8대 국회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8대 국회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7대 국회 시절에 비해 의석을 2배로 늘렸는데, 새로 진출한 신민당 의원들 중에는 한병채, 이택동, 나석호, 최병길 등 판사 출신의 변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사법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언론은 8대 국회가 사법파동으로 시작하였으며 “알찬 질의에 공손한 답변”이 눈길을 끌었다고 보도했다.
사법파동이 계속되는 내내 야당 의원들은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국회에 다시 진출한 양일동 의원도 질의에 나섰다. 그는 구속적부심 당시 직접 겪은 일이라며 중앙정보부원들이 유태흥 수석부장판사를 자신의 눈앞에서 협박하던 일을 폭로했다. 그는 공안검사가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중앙정보부 직제가 그대로 있고, 이 법률이 그대로 있는 한” 사법파동과 같은 일은 시정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법파동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최영도, 목요상 등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들은 중앙정보부보다는 공안검찰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믿고 있다. 홍성우 변호사는 당시에 판사들은 이 사건이 “정부 차원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법원에 대한 길들이기를 시도한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담당 검사가 워낙 법원 쪽에 악명이 나 있던 사람”이라 공명심에 불타는 일부 공안검사들이 박 정권이 사법부를 몹시 불편해하던 분위기에 편승하여 저지른 일로 보았다는 것이다. 홍성우 변호사는 검사들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보부와 “협조하거나 논의하거나 하는 과정”은 있었겠지만, 사법파동이 “정권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 의도된 것”은 아닐 것이며 정보부가 먼저 발의해서 터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검찰의 인사이동
사법파동이 터지면서 법원과 검찰의 정기 인사는 계속 미뤄졌다. 원래 법원과 검찰은 9월 1일의 성동지원과 지청, 영등포지원과 지청의 신설 등에 따라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었으나 사법파동으로 계속 미루어진 것이다. 법관들은 사법파동과 관련된 검찰 인사들의 문책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검찰의 인사는 큰 관심을 모았다. 마침내 8월 24일 전국 366명의 검사 중 58%인 214명을 이동하는 대규모 인사가 단행되었다. 서울지검공안부의 김종건과 이규명은 각각 전주지검과 천안지청으로 발령받았고, 대검 차장 물망에 오르던 서울지검장 김용제는 대검검사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대현은 서울고검 검사로 전보되었다. 법관들이 지목한 문책 대상자 6명 중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4명은 공안 일선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종건과 이규명의 경우 서울 근무 2년이면 자동으로 지방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김종건은 고향인 전주로, 이규명은 서울과 가까운 천안으로 발령이 났다는 점에서 문책성 인사라 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최대현은 1년이 안 되어 청와대 사정보좌관실로 발령을 받았고, 이규명 역시 청와대에 근무하게 되었고, 김종건도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니, 10월 유신 이후 법원이 치러야 했던 대가에 비한다면 검찰은 문책이 아니라 포상을 받은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허무한 결말
8월 27일 대법원장 주재 아래 열린 재경법관 전체회의에서 민복기는 이번 파동과 관련하여 검찰 관계자의 징계나 인책을 요구하는 것은 법관 특유의 초연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법관들을 달랬다. 민복기는 회의 후 발표한 성명에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거론했는데 이는 박정희가 1년여 뒤에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자행하면서 써먹은 논리이기도 했다. 법관들은 격론 끝에 사표 철회를 결의했다. 형사지법 판사들은 성명에서 “지금까지 사법권 독립의 수호를 위한 우리의 충심에서 나온 주장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사태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축 늘어진 어깨로 업무에 복귀했다. 전국 법관의 3분의 1인 153명의 판사들이 사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의 결말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것이었다.
법관들은 사표 제출이 가장 단호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홍성우 변호사는 돌이켜보면 “그런 방법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민사재판은 재판이 좀 지연되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형사재판은 구속 피고인들이 일주일만 재판 안 하면 미결구금일수가 그만큼 늘어나고 영장 등 그날그날 처리해야 할 일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에 법관들이 사표를 내고 투쟁을 계속한다는 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최대의 무기라고 생각하고 사용했던 게 별 쓸모가 없는 무기”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 사표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 뒤의 허탈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홍성우는 원래 1972년 봄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할 생각이었는데, 사법파동이 허망하게 끝난 뒤 “더 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10월에 김공식 판사와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이보다 앞서 이범렬 부장판사는 8월 28일 사표를 제출하여 법복을 벗었다. 그는 “평생을 법원에 몸바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사법파동이 남긴 것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홍성우, 김공식 등이 법원을 떠나고, 1973년의 법관 재임용(다음 회)으로 평소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던 법관들이 다 잘려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내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민복기는 박정희가 죽은 뒤인 1981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중에 박정희를 만났을 때, 박정희는 “사법파동이 장기화되었더라면 계엄을 선포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이 말을 그 후에도 몇 차례 되풀이하였는데, 이는 박정희가 그만큼 사법부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2년 다시 한 번 헌정질서를 유린한 박정희는 이제 더는 사법부 문제로 골치를 앓지 않도록 근원적인 해결책을 강구한다. 사법부에 회한과 오욕만이 남은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검찰, 법 어기고 ‘반공법 판결’ 판사 피의사실 언론에 줄줄
검찰, 미행·사찰 ‘사법부 손보기’
이범렬 판사 향응수수 혐의 영장판사들
‘법원 도청’등 폭로·줄사표검찰 옹호
민복기 대법원장 사퇴 요구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제 7 화 - 사법파동 (상)
사법부의 독립성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들의 법원난입사건이나 동백림사건 당시의 괴벽보사건은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60년대 후반부터 사법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이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그야말로 중정(중앙정보부)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서 할 건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가 그때만 해도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법원은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 힘이 세다는 말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지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이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법관 2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 71년 7월 사법파동 당시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형사지법 판사들의 사표를 모아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단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 이규명 검사는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재판장인 이범렬 부장판사가 배석 최공웅 판사 및 참여서기 이남영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 사실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잘한 일은 아니지만, 출장비가 책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피고인측의 요구로 현장검증을 나갈 경우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는 일이었다. 당직이었던 손진곤 판사는 선배 법관의 영장을 심사할 수 없다며 송명관 형사법원장에게 사건의 재배당을 요구했고, 송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유태흥 수석부장판사에게 사건을 재배당했다. 유태흥 판사는 5시간의 기록검토 끝에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의 영장청구에 판사들은 격앙했다. 홍성우 판사 등은 각 방을 돌며 판사들을 리더십이 강하고, 성격이 화통했던 형사8부 전상석 부장판사 방으로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는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다고 한다. “이럴 바에 우리 다 쥐약 먹고 죽어버리자” 소리까지 나왔다니 결론이 집단사표로 내려진 것은 차라리 온건한 것이었다. 판사들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작성하였고 유태흥 수석부장판사는 전부 37명의 사표를 송명관 법원장에게 제출했다.
검찰은 집요했다.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하여 다음날 새벽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보강된 증거란 두 판사가 출장가서 ‘객고’(客苦)를 푼 것에 관한, 좀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검찰은 이범렬 판사를 미행하고 이들을 접대한 여성들은 심문하여 이런 정보를 수집했다. 더구나 검찰은 보도진에게 구속영장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형법 제 126조의 “검찰 등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등이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한 피의사실공표죄를 명백히 범한 것이었다. 검찰이 잠자던 법원당직자를 깨워가며 접수시킨 치졸한 내용의 2차영장은 또 다시 법원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이범렬 판사에 대한 영장청구는 이규명 검사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김종건 검사가 담당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어 법무장관 신직수가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김종건이 이범렬과 친분이 있어 사건을 회피했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기도 했다.
왜 이범렬 부장이었나?
표적이 된 이범렬 부장판사는 심성이 곱고 착했지만, 검찰과의 관계에서는 자를 것은 칼로 자르듯 서릿발 나게 확실히 잘르는 존경받는 법관이었다. 목요상 변호사는 자신이 <오적>사건과 <다리>사건을 맡아 심신이 고달파 서울형사지법의 부장판사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는데, 이범렬 부장만이 소신껏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이범렬 부장의 형사지법 항소3부는 1971년 1월부터 7월까지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19건의 사건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고, 반공법 위반사건 5건에 대해서도 무죄 또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대생 신민당사 농성사건을 무죄판결한 양헌 부장판사와 함께 검찰의 ‘사랑’을 담뿍 받게 된 것이다. 검찰은 양헌 판사도 얽어 넣기 위해 수사관을 구치소에 잠입시켜 정보를 수집하기까지 했는데, 양헌 판사의 부인에게 돈을 주었는데 “돈은 돈대로 처먹고 형은 빵, 실형 때리고 영 나쁜 놈”이라고 불평을 터트리는 재소자를 만나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중간에 돈을 전달하던 사람이 꿀꺽해버린 것이라 양헌 판사는 다행히 화살을 비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현직법관이 향응이나 금품수수와 관련하여 구속된 사례는 자유당 시절에도 몇 차례 있었고, 심지어 서울지법원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 대하여 법관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적은 없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검찰의 보복이었음이 명백한 것이었다.
파동의 확산
형사지법의 젊은 단독판사들은 대법원장의 면담을 요구했고 휴가 중이던 민복기 대법원장도 급거 귀경하여 소장판사들과 만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온 민복기는 대법원장인지 법무장관인지 모를 언동으로 빈축을 샀다. 그는 이번 사건이 법원과 검찰의 갈등처럼 알려져 있지만, 자신은 갈등으로까지는 해석하지 않으며 사소한 개인사건으로 서로가 의사전달이 안 돼 빚어진 오해일 뿐이라고 사태의 의미를 축소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사법권 침해나 보복으로 보지 않는다면서 법무부 장관을 만나 해결책을 모색해보겠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법관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대법원장이 사법권 침해가 아니라 오해라고 검찰을 비호하면서 겨우 법무장관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니 젊은 판사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대한변호사협회는 비상총회를 열어 검찰보다도 대법원장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퇴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르면 사법부의 최고책임자인 대법원장이 법관들의 비장한 결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검찰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영도, 홍성우 등 판사들은 7월 30일 대법원장 면담을 앞두고 더욱 강력하게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사법침해 사례를 1) 반공법·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법관을 용공분자로 취급하여 협박하고 신원조사를 했다, 2)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했다, 3) 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4) 판사들을 미행·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 등 7개항으로 정리했다. 서울민사지법원의 법관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민사지법의 판사 44명도 집단사표를 제출했고, 형사지법의 판사들과 더불어 위의 7개항을 뼈대로 한 사법권수호건의문을 발표하였다. 건의문 발표와 함께 서울형사지법의 홍성우, 김인중, 최영도, 장수길, 금병훈, 목요상, 김공식 등 7명의 판사가 민복기 대법원장을 방문하여 검찰의 사법권 침해사례에 대한 시정책을 강구할 것을 요청했다.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대법원장이 “놀라시는 척 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검찰총장에 법무장관까지 지내 검찰의 행태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 만한 대법원장이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판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여태까지 외압에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검찰과 정보기관에서 일일이 판사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은행계좌 조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판사들은 사법부의 건의문에 대해 서울지검 차장검사 박종훈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고 법관들의 건의문에서 거론된 7개항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7월 31일에는 가정법원 판사 4명, 휴가 중이던 민사지법 판사 8명, 서울고법 판사 13명이 사표를 제출하여 사표를 제출한 법관의 수는 총 1백 명을 넘어섰다. 당시 법관의 정원은 455명이었는데 파동발발 사흘 만에 근 4분의 1의 법관이 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판사들의 사표제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방과 고등법원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한편 검찰은 두 차례나 영장이 기각된 데다가 뜻밖에 판사들이 일치단결하여 집단행동으로 나와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검찰은 서울사법서사회가 수수료 일부를 서울민사지법 등기소에 정기적으로 상납을 한 혐의가 있다면서 일제 수사에 착수하는 것으로 맞불을 놓았다.
(다음 회에 계속)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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